인류세의 인문학 (한겨레)
제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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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캐럴린 머천트 |
분야 |
인문/교양 |
출판 |
동아시아 (22.06) |
청구기호 |
<책 소개>
인문학은 인류세를 예언하고 있었다
인류세를 넘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대안을
인문학에서 모색하다
<출판사 서평>
과학기술, 문학, 예술, 철학, 종교, 윤리의 측면에서 인류세를 조망하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질시대를 ‘홀로세(Holocene)’라고 불렀다. 대략 1만~1만 200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이때부터 상대적으로 기후가 안정되었고 그 덕택에 사람들은 세계 도처에서 정착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파울 크뤼천과 유진 스토머는 2000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크뤼천은 1995년 오존층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대기과학자이며, 유진 스토머는 ‘인류세’라는 용어를 처음 고안한 생물학자이다. 이들은 1784년, 그러니까 18세기 후반을 인류세가 시작한 시점으로 보자고 말한다. 그러니까 약 200년 전에 지질시대를 나눌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말이다. 그 사건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1784년은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한 연도이다. 이때부터 증기기관 내부에서 화석 연료를 연소하는 방식이 개발되었고, 이후 나온 증기 보트나 기차, 그리고 증기를 동력원으로 하는 여러 산업이 탄생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대기권에서 배출된 온실가스의 양이 대폭 증가했다. 그리고 추후 연구된 결과에 따르면, 이때부터 이산화탄소와 메탄의 대기 내 축적량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는 인류세의 파괴적인 결과를 눈앞에서 목격하고 있다. 이상기후 현상에 관한 뉴스를 하루가 멀다 하고 접하고 있으며, 사회 전체가 저탄소 체계로 전환하려 발버둥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인류세의 다양한 특성을 정리하고 과학기술의 역사, 문학, 예술, 철학, 종교, 윤리의 측면에서 어떻게 인류세라는 시대적 위기에 대응하는지 조망한다. 기후변화의 파괴적인 결과는 얼마 전부터 가시화되었지만 인문학은 이미 이러한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다. 이 책의 저자인 캐럴린 머천트는 인류세가 도래한 것은 단지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을 취한다. 과학, 예술,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관의 전환, 관점의 전환, 가치의 전환이 일어났기 때문에 인류세가 도래한 것이다. 우리가 인류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똑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새로운 세계관, 관점, 가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인문학이 기록한 인류세의 역사
인류세는 어떻게 인류의 인식을 변화했나
이 책의 1장인 ‘역사’는 사실상 인류세와 관련된 과학기술의 역사이다. 어떤 과학과 기술이 등장하고 발전해서 인류세로 가는 길을 열었는지 세심하게 논의한다. 그 가운데서 중심이 되는 것은 ‘열역학 제2법칙’(소위 말하는 ‘엔트로피의 법칙’)의 발견과 그 활용인데,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뿐 아니라, 사디 카르노, 에밀 클라페롱, 윌리엄 톰슨, 루트비히 볼츠만, 비교적 최근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일리야 프리고진까지 언급하며 인류세를 발생시킨 과학적 기반을 고찰한다. 이 책의 저자인 캐럴린 머천트는 에코 페미니스트로 가장 명망 있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과학사가로서도 매우 중요하다. 과학사와 관련한 그녀의 분석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만한 시사점을 전한다.
예술이나 문학의 측면에서 볼 수 있는 기록들도 매우 흥미롭다. 조지프 터너나 클로드 모네의 미술 작품에서는 증기선박이나 증기기관차 같이 증기기관이 등장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그림에서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경외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미국 화가 존 케인이 그린 〈모농가헬라강의 계곡〉 같은 그림에서는 새로운 기술에 힘입어 진보하는 산업 현장의 분위기를 잘 그려내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진보에 희생되는 들판, 오염된 물과 공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찰스 디킨스, 마크 트웨인 같이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들도 급격하게 산업화되는 풍경들을 포착해 그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감상을 작품으로 남겼다. 그러한 작품들에는 산업화가 되며 발전하는 세상에 대한 경외감과 희망도 있지만, ‘희뿌연 그을음’ 같은 표현으로 묘사되는 불안감도 있다. 인류세를 통해 자연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그 충격은 한편으로 사람들의 삶과 인생을 짓누르게 되었다.
인류세를 넘어설 시대는 어떻게 도래할까?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가치를 모색하다
현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화두는 기후변화에 따른 사회 시스템 변화일 것이다. 사회 시스템을 변화하기 위해 과학기술과 정책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점에 많은 이가 공감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마도 인류세라는 시대를 만든 세계관과 가치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다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인류세의 대안을 논의할 때 인문학에 대한 고려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기후변화나 인류세와 관련해 또 하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은, 이 이슈도 뿌리 깊은 불평등 문제와 관련해서 이해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이미 기후변화는 많은 사람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주고 있는데 그 피해를 사람들이 공평하게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치명적으로 타격을 받고 있고, 주로 취약한 지역과 계층에 속한 사람들일수록 그렇다. 저자는 블룬틀란 보고서에서 말하는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 대신 ‘지속가능한 살림살이(sustainable livelihood)’라는 표현을 쓰자고 주장하는데, 이는 기본적 필요의 충족, 건강, 고용, 노후보장, 빈곤 해소, 자기 몸과 피임법과 자원에 대한 여성의 통제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인류세 시대에 인문학은 또 다른 중대한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인간들뿐 아니라 자연 전체를 조화롭게 만드는 가치를 세우고 사람들이 이를 실천하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과제이다. 쉽지 않은 과제이지만, 새로운 가치가 통용되어야만 우리에게 미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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